교황의 경제학 (에두아르 테르토)

by 함께걷는아이들 2016. 6. 11. 15:13


교황의 경제학

(프라치스코 돈의 장벽을 넘어 치유의 경제를 말한다)

에두아르 테트로 지음, 전광철 옮김

 

  

이 책은 프랑스의 기업 컨설턴트인 저자가 2015년 교황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급속도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게 경고의 메시지와 그 해결방안을 던지기 위해서 쓴 책이다.

 

필자는 우리 사회 경제 피라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낙수효과를 설명하면서 현 자본주의 체체가 붕괴된 근본적인 원인으로 세계화, 금융화와 디지털화를 꼽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피라미드 상층부에서 남아도는 돈이 밑으로 흘러 넘쳐서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살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층부에 남아도는 이윤은, 부패하고 비윤리적인 금융상품이 다 빨아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은 대출을 갚아야 하는 고금리 이자 뿐이다.

 

IT 기술의 진보에 의한 디지털화는 현 인류에게 크나큰 편리함과 유용함을 주었지만 이 또한 먹고 살만한 중상층 사람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인터넷망이 보급되어 있지 않거나, 인터넷 기술을 사용할 줄 모르는 농어촌 취약계층 사람들은 정보에서 소외되고, 더 나아가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는 선거권과 정치적 공론화에서까지 배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IT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생산자 소비자를 연결하는 수수료를 받으면서 시장 게임의 룰까지 결정해 버리는 플랫폼 기업 (구글, 페이스북 등)은 예전에 토지를 독점해서 농노들의 지대를 수탈하던 토호들과 같은 수법으로 사회 공유 이윤을 수탈하고 있다. (기차역 근처 토지 가치는 사회가 공동으로 창출한 것과 같이 구글이 검색엔진으로 창출한 가치도 그 원래 개발에 들인 가치 이후에 추가로 생긴 가치는 구글 검색 엔진을 사용한 사용자 트래픽으로 인해서 사용자들이 공동으로 창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구글이 여기서 창출한 이윤을 수탈하는 것은 마치 기차역 근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지대를 수탈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공유경제도 소득이 늘어나지 않는 불황기에 물건을 새로 사서 쓰는 것보다 쓰고 남는 유휴자원을 서로 공유하자는 목적으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시켜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메인 스트림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왔고, 오히려 노동을 착취하고 기업규제의 틀에서 벗어나서 독점을 취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가고 있다. 알고리즘과 로봇으로 우리를 초인간 (transhuman)으로 만들려는 비인간화, 인간성 말살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의 흐름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양심의 가책 이라는 작은 돌멩이를 신발 안에 넣고 재앙으로 걸어가는 속도를 조금 늦춰 보는 것이라고 이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후반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과 환경에 대한 그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밝히신 원칙들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을 소비사회의 효용이나 이윤 획득 가능성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따라 쓸모없는 이들을 폐기 처분하려는 폐기처리 문화 (junk culture)에 따른 배척의 경제는 안된다,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는 안된다, 폭력을 낳는 불평등은 안된다, 인간의 비명은 물론이고 지구(환경)의 비명에 귀를 기울여라. (, 이 행성 대다수에 해당하는 배척된 존재들의 비명이 여기에 해당함)


마지막으로 저자는 세계 경제 위기 전환을 위해서 다소 유토피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세계 금융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금융투자가, 대규모 경제주체, 시민사회, 종교계가 함께 개최하는 G20, 즉 일종의 브레턴우즈 협정이 그것이다. , 교황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이해관계를 넘어선 연대를 촉진하고 경제와 금융이 인간을 위한 윤리를 회복하도록 이끄는 금융 투자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그 협정의 목표이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든 말씀 중에서 행동의 긴급성에 주목한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십계명에 금지된 경제적 살인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노동과 생존에서 배척된 어느 가장이, 어느 청년이 삶의 마지막 끈을 놓은 채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며칠 전엔 노동수칙을 지킬 심리적 시간적 여유도 못 가진 열아홉살 소년이 혼자서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지하철에 치어 숨졌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넣고 다니다 못 먹은 컵라면 하나 덩그라니 남긴 채로... 이런 일이 수차례 벌어졌어도 긴급하게 행동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는 번번히 무시되었다. 비용과 효율의 관점에서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고 그나마 알바나 일용 노동직도 못 구한 사람들은 스스로 폐기처분 (자살)하도록 유도하는 우리 사회는 배척과 폐기처리 문화는 안된다고 하신 교황님의 권고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안전수칙을 지킬 시간적 여유도 노동협약에 있어서의 단결권도 부여하지 않은 노동현장에서 일어난 사고의 책임을 노동자의 근무태만으로 돌리는 사업주의 신발안에는, 이윤추구를 향해 돌진해서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만한 티끌만한 (소위 양심의 가책이라는돌멩이라도 에저녁에 털어버리고 없는 것이 오늘의 비정한 현실이다.

 

유한한 행성인 지구에서 배척당하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우리 자손 세대와 공유해야 할 자연과 생태계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속도는 가공할만한 수준이다. 무한 성장이라는 헛된 신념은 지구 자원을 무한히 활용할 수 있다는 망상으로 이어져 지구를 쥐어 짜고 있다. 인간이, 생태계 자연이 배척되고 있는 이 지구에서 가까운 미래에 초인간주의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의 영혼까지 지배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이 머리털을 쭈뼛하게 세운다.

 

이러한 현실에서 경계는 허물어진다. 기업은 정부의 규제를 벗어나고, 경제권력이 국가를 지배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사고 팔수 있다고 믿게 되며, 공유재와 사유재의 경계가 모호해 진다. 인간과 기계의 구분도 불분명해지고, 초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경계를 넘나들고,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해 진다.

 

도대체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인류는, 우리 지구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남들은 나에게 오버한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이십대인 나의 아들에게 자식을 낳으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만큼 자식 손자 세대의 미래에 대해서 나는 자신이 없다. 우리 세대가 그들 세대에게 부유한 세상을 물려준다는 미명하에 그동안 저질러온 폭력과 착취를 생각하면 더욱 더 미안하고 그들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과연 그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아직도 남아있기나 한 것일까?

 

저자의 이 제안이 다소 황당하고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솔직히 그의 제안이 그다지 현실가능성이 있다고 믿겨지지는 않는다. 특히 탐욕에 눈이 먼 금융투자가와 대규모 경제주체가 함께 손잡고 윤리 금융에 대한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스케일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인간과 지구 말살의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방안 말고 다른 무슨 대안이 또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