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정유정)

by 함께걷는아이들 2016.07.12 13:04


28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의 28은 인수공통전염병 (인간과 동물이 교차 전염시킬 수 있는 전염병)이 창궐한 서울의 위성도시 화양에서 28일간 일어난 일을 51(다섯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개) 의 관점에서 서술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구제역 사태때 돼지 살처분 하는 것을 보고 인수공통전염병 이라는 모티브를 얻어서 썼다고 한다.


평소에 소설을 그닥 즐기지 않는 나도 몰입해서 단숨에 읽을 만큼 이 책은 스토리가 탄탄하고 재밌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고, 5명의 사람과 1마리의 늑대개가 동일한 상황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나레이션 하는 스토리의 전개가 특이하다. 즉, 이 소설에서는 한 화자의 시선으로 본 어떤 상황을 다른 화자는 전혀 다른 시선에서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재해석 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각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와 많이 닮아 있다. 

 

5인 1견


알라스카에서 한국인 최초 개썰매 선수로 활동하다가 사고를 당했지만 늑대에게 자신의 썰매개들을 먹이로 주고 겨우 살아난 후 화양에서 드림램드 라는 동물병원을 운영하면서 유기견들을 돌보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서재형

 

한 통의 투서를 받아 서재형의 이중성을 보도하게 되면서 서재형과 악연을 맺게 되지만 인수공통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신문 기자 김윤주

 

119 구급대의 대장으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헌신하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잃게 되는 한기준

 

부모로부터 받은 편애의 트라우마로 사이코패스로 자라난 박동해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지만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다가 무법천지 상황에서 윤간을 당하고 목숨을 잃고 마는 간호사 노수진

 

늑대개로 태어나 투견용으로 잡혀가 갖은 고생 끝에 탈출해서 사랑 (스타라는 썰매개)을 찾지만 인간의 오해와 폭력으로 희생되고 마는 링고

 

소설의 이야기는 이 51견이 같은 상황을 각자의 시점에서 나레이션 하면서 펼쳐지는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시간적으로 어긋나면서 긴박하고 안타깝게 전개된다.

 

인간의 두려움과 폭력

 

인간의 폭력은 많은 경우 두려움으로부터 야기되곤 한다. 두려움은 내가 익숙하지 못하거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미지의 상황에서 생겨나는 사람의 본능으로 이 소설에서는 전염병의 증상인 빨간 눈이 인간의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빨간 눈으로 상징되는 치사율 100% 의 전염병과 이 전염병을 옮긴다고 알려진 개라는 동물.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다른 사람이나 개를 해치는 폭력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실체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폭력 (살처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은 상대방을 충분히 알고 이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극도의 두려움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성적 사고와 이해는 작동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 소설은 두려움이 지배하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들의 심리와 행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다른 피조물에 대한 공감과 구원

 

이 소설에는 두려움, 폭력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눈썰매 대회에 참가중 늑대이 습격을 받자 자신의 썰매개들을 늑대에게 재물로 받치고 자신만 살아난 서재형이 버림받은 유기견을 돌보며 살아가는 드림랜드는 개라는 동물에 대한 죄책감을 구원으로 승화시키는 장소인 동시에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동물과 사람이 서로 공존하고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이상향이다.

 

나는 때로 인간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서재형은 자신이 아끼는 썰매개 스타를 죽인 한기준을 구하기 위해서 늑대개 링고를 희생시키고 인간이 없는 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이 소설에서 인간의 구원은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의외의 사람을 통해 이루어 진다. 서재형에 대한 고발 기사로 악연을 맺은 기자 김윤주는 결국 서재형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고 그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와 함께 개들의 살처분을 막는 구원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늑대개 링고와 그의 사랑 썰매개 스타가 살처분을 당하는 개들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장면은 너무 리얼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서재형-스타-한기준-링고 으로 이어지는 악연과 구원의 끈은 복잡하게 엉클어져 있으며 결국 서재형과 링고의 희생으로 끝이 난다. 재형과 윤주도 고발 기사라는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자신이 아끼던 반려견 스타를 죽인 한기준을 구하기 위해서 서재형은 목숨을 내놓게 된다. 이 소설의 작품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가장 증오했던 대상을 구원하고, 가장 혐오했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역설, 그 속에 구원의 비밀이 숨어 있다.” 고 말한다.

 

화려한 기사에 목말라 있던 취재 기자 김윤주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쓴 화양의 대재앙이 개를 통해 감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찬 기사가 의도하지 않게 무참한 개 학살을 정당화 시키는 도구가 되고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살려주세요.” 라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에 파묻혀 죽어 가는 개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냉정한 취재 기자에서 피조물의 영혼의 절규를 들을수 있는, 그리고 전염병으로 사망한 노인의 앞 못 보는 손녀 승아를 돌보아 주는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로 거듭나게 된다. 살려달라는 영혼의 외침은 단지 살처분 당하는 개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완전히 고립되어버린 화양 시내에 운집한 수만 인파들의 외침.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를 살게 하라.” 이 소설에서 최악의 사이코패스 악당으로 나오는 박동해도 어릴적 부모로부터 정신적 편애와 학대로 정신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불쌍한 영혼이다. 박동해가 동네의 개들을 묶어 놓고 사정없이 패는 것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그 나름대로의 살려달라는 외침이었으리라.

 

구제역으로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의 울음, 인간의 이기심과 변덕에 의해서 유기되고 버려짐으로써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반려동물들의 원망에 가득찬 마지막 눈망울,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재되어 삶의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린채 무너져 내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살고 싶다는 외침... 이러한 절절한 외침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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