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버트런드 러셀)




이 책은 20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천재 버트런드 러셀의 자전적 에세이다.

 

단순하긴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생애를 지배해왔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지식의 탐구, 그리고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내가 사랑을 추구해온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황홀한 열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을 추구해온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중략)

 

이와 동등한 열정으로 나는 지식을 추구해왔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별이 빛나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숫자라는 질서가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지배하게 해주는 피타고라스적인 힘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왔다. (중략)

 

사랑과 지식이 내게 허용되는 한, 그것들은 나를 천상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언제나 나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중략)

이것이 내 생애였다.

나는 이런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이런 삶을 다시 한 번 살 것이다.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난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철학, 수학, 과학, 역사, 교육,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서 4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다. 그의 지식 탐구는 크게 두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절대적 확실한 지식의 탐구였고 (수학과 기호논리학),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관심 (인권 평화운동가)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901년 러셀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받아 들여졌던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집합론 간에 모순이 존재함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러셀의 역설 (Russell’s Paradox) 이다.

 

러셀의 역설을 수학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M이라는 집합을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자. 다시 말해, AM의 원소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A의 원소가 아닌 것으로 한다.

칸토어의 공리체계에서 위와 같은 정의로 집합 M은 문제없이 잘 정의된다. 여기서 M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그 정의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에 의해 M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M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에는 다시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에 포함되어야 한다. "MM의 원소이다"라는 명제와 "MM의 원소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둘 다 모순을 도출하여 맞다 혹은 그르다 중에 어떤 답으로 답할 수 없다.

 

이러한 역설을 쉬운 예로 설명한 것이 세비야 이발사의 역설인데 다음과 같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 세비야 이발사 전체는 스스로 이발을 하는 이발사 그룹 A와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이발사 그룹 B로 나누어지는데,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면, 이 이발사는 스스로 이발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만일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에 속하므로 자기 자신의 이발을 해야 하고, 만일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에 속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이발을 하면 안된다. ,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하지 않게 되고,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하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러셀의 역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 (Liar’s Paradox) 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 역설은 이 말은 거짓이다.” 는 말이 자기모순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 “이 말이 거짓이다라는 말은, 참이면 거짓이 되고, 거짓이면 참이 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또한 러셀이 본인의 스승인 화이트 헤드와 함께 쓴 수학 원리는 현대의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러셀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관심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전 평화주의자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반핵 운동가로서 활동하게 하였고, 1905권위와 개인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노벨평화상을 잘못 쓴 줄 알고 몇 번이나 검색해 봤다. 그렇다. 평화상이 아니고 문학상이다. 한 개인이 지성의 바다에서 이룰 수 있는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은 자전적 성찰, 행복, 종교, 학문, 정치의 영역에서 쓰여졌는데, 때로는 수학의 논리적 사고가, 때로는 휴머니즘의 감수성이 드러나는 문체가 돋보인다.

 

<행복관>

 

이 책을 읽고 러셀의 행복론이 나의 그것과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는 행복해 지기 위해선,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그 대신 외부 세계로 관심사를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 나 자신에 대한 혐오, 자아도취 또는 과대망상에서 벗어나서 세상사와 다양한 학문, 그리고 내가 애정을 느끼는 외부의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행복해 진다고 하면서

외부 세계의 관심사들이 각각 그 나름의 고통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종류의 고통은 나 자신으로의 과다 관심으로 인한 고통 처럼 삶의 본질을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 경험상 러셀의 이 말은 정말로 맞다.

나도 젊었을 때 모든 관심이 나 자신에게 쏠려 있을 때가 있었고, 그때는 이유 모를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었으며, 그때를 떠올리면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다양한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사와 다른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오늘날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건 정말 내가 해봐서 아는 진리다.

 

<종교관>

 

무신론자인 러셀은 이 책에서도 부분 발췌해서 소개하고 있는 단행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러셀은 신이 없다고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만약 모든 것이 원인이 있다면 신 또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래야 한다는 인간의 법칙과는 달리 자연의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술한 것에 불과하므로 왜 신은 하필이면 사물들에게 그렇게 움직이라고 시킨건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자연 법칙의 연속성을 차단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이 세상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나 계획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세계에서 엄청난 불의를 발견했다. 그것은 정의가 우주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추정할 만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그것은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반박하는 주장에 근거를 제공한다.”

 

러셀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교회가 스스로 규정한 도덕을 고집하면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당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왔고 인류의 진보를 지체시켜 왔다는 점,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유용성에 기초한 교리 체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진실을 탐구하려는 노력을 방해해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선하고 가장 현명한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와의 논쟁은 언제나 껄끄러운 법이다. 내게 종교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나의 한계 (육체, 지력의 한계,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한성 등등)를 인정하고 그 한계가 닿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의 영역에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는 오히려 내가 가진 한계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무엇을 알아 갈수록, 인간으로서 가지고 태어난 잠재성이 현실에서 발휘되면 될수록,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크게 보이고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과 한계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인생의 역설이다. 그것은 마치 저 반대편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에 갇혀서 손전등으로 내 발 바로 앞을 비추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저만치 내 앞에 펼쳐져 있을 어둠의 심연이 더 깊고 멀게만 느껴지는 현상과 같다고나 할까? 러셀 스스로도 자신이 신이나 내세 같은 문제들의 진실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 라고 밝혔으니 그 스스로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다. 그는 우리의 삶이 어떤 (신이 의도한) 목적을 갖지 않고,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개별 인간에게 펼쳐진 삶은 그냥 우연히 벌어지는 하나의 현상이고, 인간에게 영혼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적 증거가 없는 교리의 체계는 그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교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마치 음악이나 시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같이 허망한 일이다. 하루에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천 단어 분량의 글을 썼다는 러셀은 평생 놀라운 지능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아무리 그도 인간의 한계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그가 상상하는 인간 지력의 한계는 평범한 나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없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학문관>

 

러셀은 철학의 사람은 철학을 배움으로써 지금그리고 여기라는 사고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지적 상상력을 확대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물리적 욕구나 동물적 욕망에서 벗어나 세상과 사물에 대한 보편적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였다.

 

철학이 하는, 혹은 해야하는 첫 번째 일은 지적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것이다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본다. (중략


과학은 이런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한다. (중략여기에도 지적인 해방의 단계들이 있다역사학과 지질학은 우리를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며, 천문학은 여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이런 학문들로 가득 찬 정신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자아가 시공간계에서 매우 특별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둘러싸고 우연하고도 사소한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그의 지성은 점점 더 물리적 욕구에서 분리된다그는 동물적 욕망에 얽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보편성과 시야의 힘을 획득한다.

 

그는 우리가 살면서 다양한 세계관을 접하게 되는데 인간이 오류를 번하기 쉽다는 점언뜻 보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기실 불확실하다는 깨우침을 우리에게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철학의 지적인 용도라고 했다. 또한 나와 다른 믿음을 지닌 세계관을 접했을 때의 사고의 혼란을 방지하는 방법은 근거에 입각하여 사고하되, 근거가 부족할 때는 확실성을 포기해야 하며 (그의 무신론과 일맥상통함), 이러한 사유의 습관은 적대적인 독단론 (dogmatism)이 인류를 위협하는 이 시대에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혜와 지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혜에 대한 요소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균형감 (어떤 문제의 중요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고 그 각각에 적절한 중요도를 부여하는 역량), 인간 삶의 목적에 대한 특정한 인식, ‘지금 여기가 휘두르는 폭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등이 그러한 요소들이며, 지혜는 지식과 기술이 우리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에 지식과 기술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많은 지혜가 필요해진다고 러셀을 주장하고 있다.

 

<미래관>

 

러셀은 인간의 본성에 자신들이 친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공포심이 존재하며,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을 증오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포와 증오심으로 인하여 전 세계는 경쟁하는 이념들의 갈등으로 세계 1, 2차 대전을 겪게 되면서 러셀은 반전 반핵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폭력에 대해서 저항했다. 세상에 만연한 증오와 적대심, 갈등과 폭력을 목격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인간 본성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혜가 인류에게 가져다 줄 선물 때문이라고 보았다.

 

최후의 인간이 지하세계의 재판관 앞에 가서 인류이 멸종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변호할 때, 과연 그는 어떤 주장을 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인류의 삶은 대체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농사와 사회적 불평등과 조직화된 전쟁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대다수 인류는 고통과 과도한 노동, 그리고 가끔씩 찾아오는 비극적인 재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아마 앞으로는 이렇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약간의 지혜가 모든 인간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약간의 지혜가 곧 생길지 여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중략)

 

내가 만일 오시리스 신(죽은자를 심판한다고 알려진 이집트의 신)에게 인류의 존속을 탄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공정하고 너그러운 재판관님. 우리 종족에게 제기된 혐의는 모두 충분히 타당하며,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더욱 그러합니다. (중략)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지배력에 도취하여 다른 인간들에 대한 지배력을 추구하는 길로 잘못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우라기 불완전하게 벗어난 늪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미혹하는 도깨비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모든 기력을 흡수하지는 못했습니다. (중략) (인류가 그동안 이룬 성과들을 나열하면서...)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며, 시간이 주어진다면 미래 세대가 성취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시리스 신이시여,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두 손 모아 간청드립니다. 당신께서 한 번의 유예를 허락하시어 우리가 고대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빛과 사랑과 아름다움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주시기를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 종이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한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그러한 가능성들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여러 방면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류가 지닌 지식의 지평을 넓혔으며

사물과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평생 노력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되도록 고통이 적고 행복한 것이기를 열망했으며

그 열망에 실현되도록 행동으로 실천한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굳게 믿었기에

그의 후 세대는 그의 세대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희망이 나의 후 세대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나도 오늘 같은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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