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豐⾂秀吉)는 한국 역사엔 악몽 같 은 존재지만 일본에선 동북아 전역에 자국의 이름을 또렷이 각인시킨 영웅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 호수를 끼고 발달한 나가하마 시(市)도 마찬가지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지시로 자유무역 도시가 된 이곳은 한 때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대상업도시로 번창했던 과거를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나가하마시의 경제는 굳건했지만 1960년대 들어 인구 감소가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도심 공동화 현상에 급격히 진행되면서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줄자 빈 상점도 급격히 늘었다.

나가하마시에서 20여 년간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야마자키 히로코 이사장은 당시 나가하마시 상황을 두고, "1시간에 사람
이 4명에 개 1마리가 지나가는 죽은 도시였다."고 말했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나가하마시의 노력은 1975년 시작됐다. 마을 주민들이나서 자발적인 재생 가능한 도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시에 제안한 것이다. 1988년 지역주민이 출자해 만든 ㈜구로카베가 선봉장 역할을 했다. 덕분에 민‧관 협력형 도시재생 사업 추진이 원활해 졌다. 10년 후인 1998년엔 마을만들기 관련 민간 조직(NPO)이 설립되고 2009년 마을만들기 주식회사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활력 있는 도시로 바뀌어 연간 400여개 단체, 2800명 이상이 견학하는 성공적인 주민주도형 재생 모델이 됐다.


(야마자키 히로꼬, 나가하마시 마을만들기 NPO이사장이 나가하마시의 주민 주도 마을만들기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가하마엔 마을만들기 사업을 상징하는 일종의 랜드마크가 있다. 바로, 쿠로카베 이다. (현재는 유리공예 공방 겸 판매 공간으로 사용) 140년 전 ‘다이하쿠산주은행 나가하마 지점’으로 개설된 이곳은 흙벽 구조의 서양식 건축물로 외벽을 검은 회색으로 마무리한 것이 특징인데 ‘구로카베 은행’이라는 애칭으로 지역사람들에게 친숙해져 있었다. 1945년 일본 폐전 이후에는 기독교 단체, 교회로 건물 용도가 바뀌면서 하얀색 건물로 바뀌었다.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는 쿠로카베가 황폐해진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거점이 된 배경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자리하고 있다. 경기 악화로 쿠로카베 건물이 매각 위기에 놓이자 동네 주민 가운데 경제적 여력이 있던 사람들이 나서 투자를 약속한 것이다. 현재 쿠로카베는 지역 기업가가 투자한 6천만 엔과 정부 세금 4천만 엔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나가하마 마을만들기 사업은 회색빛 쿠로카베 건물을 중심으로 백여 개 상점들이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쿠로카베를 중심으로 한 나가하마의 마을만들기 사업은 시작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을 외곽에 일본 내 최초의 쇼핑몰이 생겨난 것이다. 뒤이어 주변을 중심으로 맥도날드, 대형 양복점 등의 시설들이 들어섰다. 쿠로카베 인근에 입점해 있던 50% 이상의 상가들이쇼핑몰로 옮겨갔고, 쿠로카베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나가하마 주민들이 찾은 회생의 돌파구는 이번에도 지역이었다. 바로, 지역의 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제는 일본 3대 다시(축제용 수레)축제로 발돋움한 나가하마 히키야마 축제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1573-1603), 나가하마 성주 하시바 히데요시(나중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첫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를 기뻐한 히데요시는 성 아래 사람들에게금을 선사했고, 마을 주민들은 이 금으로 12대의 수레를 만들어 하치만구 신사 제례에서 끌고 다닌 것이 그 시초다. 쿠로카베는 이 축제를 전승 및 발전시키면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었고, 이는 그대로 나가하마시의 마을의 경제 및 사회적 발전으로 연결됐다.
결국 나가하마시 쿠로카베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서려있는 지역의 문화를 살리겠다는 마을만들기 본연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이는 마을 외곽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과 견줘 경쟁우위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실제 해당 쇼핑몰은 10여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나가하마 히키야마 축제는 일본 3대 축제 가운데 하나로 불리고 있으며, 사진은 실제 사용되는 12개 수례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