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삶이란 모름지기 9 to 6로 설명된다.

9시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는 미덕을 갖춰야 하고 6시 칼퇴는 참으로 보장되기 어려운 것이 직장인의 삶이다. 함께걷는아이들(이후 재단)은 2010년에 시작되어 올해 11년 차를 맞는 조직인데, 운영 초기부터 탄력근무를 적용하였다. 재단의 사무실이 강남에 있는데 2호선 출근 인파가 장난이 아닌지라 그 시간을 조금 피해서 출퇴근해보자.라는 심플한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도입 초기에 썼던 블로그 글에 초창기 이야기가 나온다. walkingwithus.tistory.com/31?category=175613 )

 

흔한 직장인의 책상 "정신차리자!"

선택적 근로시간제

이 시도는 직원들의 사랑을 받으며 점차 확장되어 지금의 법적 제도명칭에서 찾자면 "선택적 근로시간제"로 정착이 되었다. 즉 출근시간/퇴근시간을 조정하는 것에서 일정기간(우리 조직에서는 한 달)에 근무해야 하는 시간을 계산하여 한 달 안에 그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방법이다. 즉, 하루에 근무하는 총시간(보통은 8시간)도 조정이 가능한 것이다. 어느 날 너무 일이 잘되어, 혹은 행사 등으로 일이 많아서 10시간을 근무했다면 다른 날 그만큼을 자유롭게 빼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직원들은 본인의 출퇴근 시간과 한 달 동안의 근무시간을 근무상황표에 스스로 기록한다. 한 달이 지나면 이를 정산하여 내가 근무해야 하는 시간보다 적게 근무했으면 휴가를 사용하고, 더 많이 근무했으면 다음 달에 대체 휴가로 사용한다.

 

현재 8년이 넘게 이 제도를 운영해오고 있는데, 처음 시작할때는 직원이 5-6명으로 작은 조직이라 도입이 쉬웠고, 직원이 가장 많을 때는 17명까지 간 적도 있는데 이 제도로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조직은 중간 지원 조직이라서 특정 시간을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 하는 업무가 상대적으로 적고, 업무가 각 담당자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한 편이라 더 도입에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점이 좋은가? 

솔직히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려 무엇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단지, 이 제도가 없는 조직에서 일하게 된다면 엄청 힘들 것 같다는 건 알겠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9시보다 좀 더 늦게 출근하고 6시보다 좀 더 늦게 퇴근하는 패턴이다. 각자의 생활패턴에 따라서 밤늦게까지 뭘 하는 걸 좋아하는 직원들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서 늦게 출근하는 게 훨씬 효율이 높을 것이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아이의 등원과 하원 중 하나라도 본인이 하기 위한 시간 조정이 가능하고, 아이가 아픈 날 병원을 들렀다 오는 것이 특별한 휴가나 설명 없이 가능하다. 나도 둘째 아이가 두 살 때 이 조직에 들어왔으니, 이 제도 덕분에 일과 육아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일하는 엄마지만 사무실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 학교 상담 정도는 빠지지 않고 참여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둔 부모에게 유용하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미혼의 직원들에게도 물어봤다. 선택적 근로시간의 좋은점. 

 

<선택적 근로시간으로_가능한것> 

  • 기본적인 워라밸 가능_병원, 은행, 우체국 등을 갈 수 있음.
  • 여유로운 아침이 가능_물리적 시간도 그렇지만, 일단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압박감을 줄여줌.
  • 업무효율 : 매일의 컨디션이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컨디션에 맞게 일을 할 수 있음. 
  • 업무집중이 잘 될때 늦게까지 일할 수 있고, 근무시간으로 인정됨

<선택적 근로시간으로_없는 것> 

  • 지각이라는 개념
  • 눈치보는 퇴근 : 업무집중도가 떨어질때 눈치보지 않고 일찍 퇴근할 수 있음. 
  • 지옥철

 

개인적으로 이 제도를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효율성이다. 일이 많을 때와 적을 때, 일이 잘될때와 안될 때를 조절하여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이 적은 날도 8시간, 일이 많은 날도 8시간은 너무 불합리하다. 때로는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날, 나에게 이른 퇴근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제도라고나 할까? 재단은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보니 초과근무수당을 주지 않고(못하고) 대체휴가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어찌보면 이러한 조건과 유연한 시간제도가 잘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조직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니란 말이다. 한 달의 시간이 정산된 직원들의 근무상황부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지금 업무로 허덕이는지 알 수 있다. 조정이 필요한 건 아닌지,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는지 눈여겨보는 것도 중요한 인사관리의 포인트가 되고 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적용을 안하지? 

업무상 적용이 불가능한 조직들이 분명 있다. 대면 서비스가 기본적인 곳이 대표적으로 그럴 것이다. (우리도 오산 청년들을 직접 만나는 [청년맞춤제작소]에서는 이 제도 도입을 못하고 있다. ㅠ)

그런 게 아닌 경우, 답은 간단하다. 못 믿어서. 

이 직원은 이 날 일이 없었던 거 같은데 왜 10시간을 근무했지? 나중에 쉬려고 그러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이 제도는 도입하면 안 된다. 저 직원은 왜 맨날 자리에 없어? 도대체 출근은 언제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내가 볼 때마다 그 직원은 자리에 없다. 이제 유연근무제는 관리자의 만병의 근원이 되기 시작한다. 

직원이 자리를 지키는 것과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고 성과가 나고 있는 "업무의 내용"으로 직원의 근무를 믿으면 된다. 이 고개를 넘지 못하면 다음번에 쓰게될 원격근무의 고개는 당연히 넘지 못한다. 더 큰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관리책임자가 된지 어느덧 9년 차가 되었다.

관리자가 된 이 후 가장 마음에 자주 새겼던 말은, "믿지 못할 거 같으면 같이 일하지 말고, 같이 일하게 됐으면 믿어라."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실천해왔다. 많이 그만두게 했고(윽), 같이 일한 사람들은 최대한 신뢰했다.(헤)

중요한 건, 나도 이 제도의 혜택을 아주 많이(젤 많이?) 받았으며 그만큼 우리 조직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도 그만두지 않고 장기근속하게 되었다. 우리 재단이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일을 한다는 평을 종종 듣곤 하는데,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유연근무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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