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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걷는아이들/함께걷는아이들은?

[함께걷는아이들 미션 탐구, '함께 걷는 아이들 세상'이란? ⑥] 청소년 지원 사업

by 함께걷는아이들 2018. 9. 17.

 

그 여름, 거리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생각했다.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하기에 우리가 가진 자원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사회는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는 일을 우선할 것이라 믿었었다.

2001년 움직이는청소년센터는 그렇게 거리로 나갔고,

청소년들과 관계를 잘 맺으면 그이들이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우리는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지낼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 소개했던 쉼터는 너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었고,

쉼터에서는 그런 이와 같이 살 수 없다며 쉽게 포기해 버렸고,

매일의 고통이 너무 괴로워 신청한 상담소에서는 상담원을 단 한 번도 못 만난 채 상담이 종결되었고,

여러 폭력의 피해로 신고했던 사건들은 우리를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하여 무기력에 빠지게 했고,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불쌍한지’, 얼마나 책임감을 느낄지’, 얼마나 약속을 잘 지켜야 할지를 증명해야 했다.

 

이 사회는 이들의 삶에서 권리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보다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서 살아낼지를 지켜보고 있기만 한 것 같았다.

 

 

#혼자 뛰는 어른들 세상

 

열심히 뛰고 있는 ‘어른’들…. 정말이지 그들은 ‘혼자’ 뛰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폭력과 차별이 누구에 의해 이야기되고 있을까요. 청소년들이 사는 시설에서도, 청소년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자리에도, 청소년을 위한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대안을 모으는 토론회에 가 보아도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청소년 기관에서 활동하는 한 실무자는 이런 고백으로 우리의 고민을 열어주었습니다.
“청소년이 주체라고 하는데, 정작 활동할 때 본인이 참여할래 안 할래 선택하거나 아니면 의견을 반영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닐까?”며 “지원사업이니까 실적 만들어야 하고 결과 만들고 하느라 청소년들은 어느 순간 조금씩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2018, 만나보고서)라던 그의 고민은 청소년 기관 현장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청소년들의 삶과 일상에서의 ‘어려움’, ‘고통’은 청소년 당사자가 아닌 자들이 정의하고, 그를 ‘진단’하거나 ‘처방’하는 몫도 ‘어른’들의 몫이었습니다. 당연히 폭력의 경험에 놓여있는 청소년들을 ‘대상화’하였고, 권리의 보장보다는 책임감 있다, 없다를 운운하게 되는 상황을 종종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아닌 학력을, 집 밖이 아닌 안에서 대책을 마련하라 하고, 다양한 개성보다는 사회의 규범으로 개인의 삶을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가정에서 ‘탈출’한 이들에 대해 이 사회는 불안정한, 불완전한, 폭력의 피해자로만 여길 뿐 이 사회에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살기 위한’ 그리고 ‘즐겁게 살아갈’ 도전과 대책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사회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요. 이들의 삶은 이 사회의 ‘정상성’에 대한 도전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미성숙 담론은 청소년을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로 규정하며 당사자는 원치 않는 방식의 보호, 어떤 때는 가정폭력과 다르지 않은 폭력을 사회에서 겪어나가야 했습니다. ‘위험’을 겪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시설에 ‘강제 보호’를 하고 ‘미성숙하다’며 모든 상황에서 교육을 강요당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자율적 선택과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과연 ‘보호’와 ‘교육’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청소년들은 자유에서 책임을 배우기도 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함께 걷는 아이들 세상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고민은 함께걷는아이들 청소년 사업들의 중요한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기의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여도,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느껴지는 무기력한 일상이어도,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당사자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의견들, 원하는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청소년의 ‘위치’를 설정하고 보니 청소년들에게서 우리 삶의 대안이 나오기도 하였고, 개인의 삶의 의지를 확인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개개인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또 다른 ‘희망’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사업들이 점점 청소년들을 듣기 위한 시간이, 청소년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업들이, 청소년이 직접 사회와 만나는 시도들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 분야에서 가장 ‘전문가’는 청소년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위기 상황을 경험하는 ‘청소년’ 개인에게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기에 이 사회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었고, 개인이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청소년 개인을 바라보며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과 손을 잡고 아이들의 삶의 길에 우리가 동료로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청소년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오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은 고통을 개개인의 노력이 아닌 사회적 노력으로 시선을 돌려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위기지원에서 시작되었던 많은 일이 청소년 참정권으로 가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깊이 있게 서로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 개개인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청소년과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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