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 쌀쌀한 뉴욕의 밤공기를 뚫고 중절모를 눌러쓴 중년 사업가 한 명이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카운트에 들러 객실 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장 승강기로 향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또래의 사업가는 환한 웃음과 함께 몸을 녹일 따뜻한 커피부터 권했다. 객실 구석구석 커피 향이 가득해지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한 카키색 서류 가방 속을 뒤져 간단한 몇 장의 서류와 자신이 좋아하는 만년필 한 자루씩을 꺼냈다. “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창밖에 비치는 뉴욕의 야경을 뒤로하곤 약 5억 달러에 이르는 계약서에 서명을 시작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가 철강왕의 자리를 존 피어폰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 JP모건 창립자)’에게 넘겨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후 카네기와 모건은 사뭇 다른 길을 걷는다. 모건은 계약이 성사된 날로부터 10여년 후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 US스틸을 주식시장에 상장시킨 반면, 카네기는 죽을 때까지 약 35000만 달러에 이르는 사재를 털어 자선과 기부에 몰두한다. 잔혹하고 냉정한 철강왕이 따뜻한 자선과 기부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카네기는 미국의 비영리(재단 포함)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1910년 출범한 카네기국제평화재단(CEIP)’보다 3년 앞선 1907년 미국 최초의 거대 자선 재단으로 꼽히는 러셀세이지 재단’(Russel Sage foundation)이 출범했지만 이미 20여 년 전부터 카네기의 명성은 업계 전반에 자자했다. 1889년 그가 펴낸 부의 복음(Gospel of Wealth)’이 계기가 됐다. 그는 무분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판치던 미국 사회에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부와 자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부는 신이 인간에게 관리를 명한, 신탁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부자들은 이를 사회의 발전을 위해 환원해야 한다.”는 카네기의 주장은 훗날 거대 재단을 설립한 석유왕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 1947)’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카네기 시대 이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미국은 기부와 자선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한국 정부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돈을 미국은 오로지 개인 기부로 거둬들이는 국가다. 1900년대 초 몇몇 기업가가 불을 댕긴 자선 의지는 오늘날 미국 사회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져 어엿한 국가 경제의 주체로 성장했다. 비영리영역이 경제에 끼치는 파급력은 실로 막강하다. 2010년 기준, 비영리 부문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5000억 달러로 미국 GDP5.5%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에 대한 기여는 이보다 크다. 1350만 명을 고용해 약 10%에 육박한다. 미국 사회에서 비영리영역이 갖는 사회적 가치는 보다 다이내믹하다. OECD 3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별 공공 사회복지 지출 비율(GDP 대비, 2013년 기준)을 따져보면, 미국은 OECD 평균인 21%에도 뭇 미치는 19.3%에 그쳤다. 하지만 여기에 민간 영역이 지출한 몫까지 보태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공 및 민간이 지출한 사회복지 지출 통계에서 미국은 OECD 평균 21.4%를 훌쩍 넘어 28.8%까지 상승한다. 31.2%를 기록한 프랑스에 이은 2위 성적표다.


순위

공공 사회지출 비중(GDP 대비)

공공+민간 사회지출 비중

(GDP 비중)

1

프랑스(31.5%)

프랑스(31.2%)

2

핀란드(29.5%)

미국(28.8%)

3

벨기에(29.3%)

벨기에(27.2%)

4

덴마크(29.0%)

네덜란드(25.6%)

5

이탈리아(28.6%)

덴마크(25.4%)

6

오스트리아(27.6%)

스웨덴(25.3%)

...

OECD 평균(21.1%)

OECD평균(21.4%)

29

칠레(10.0%)

칠레(12.0%)

30

한국(9.3%)

한국(11.5%)


이러한 사실은 미국 내 자선 재단 자료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재단 전문 조사기관 파운데이션 센터(Foundation Center)’ 자료에 따르면, 201412월 기준, 미국 내 재단은 모두 86726 곳이다. 200161817곳에서 지속적으로 늘다가 201387142곳으로 정점을 찍은 후, 2014년엔 400여 곳이 줄었다. 수치로 본 상승세는 한풀 꺾였지만, 질적인 면에선 보다 튼튼해졌다. 미국 재단의 누적 자산은 2007년 하반기부터 불어 닥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제외하면 지속적인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2003년 미국 재단의 누적 자산은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2008년 잠시 주춤한 이후, 2014년까지 지속적인 누적 자산 증가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간 기부금 규모도 2배 넘게 늘었다. 20033000억 달러에서 20146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처럼 미국 내 비영리섹터는 천문학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100여 년 전과 차이가 있다면, 과거 미국의 자선재단이 기업재단과 이들의 거대 기부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면, 오늘날 미국의 자선재단들은 개인의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을 자양분 삼아 성장궤도를 그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파운데이션 센터는 2014년 기준, 미국 내 재단 가운데 92%는 민간독립재단이라고 밝혔다. 기업재단은 전체 재단 가운데 3%에 불과하다. 게다가 미국의 민간독립재단은 되도록 급여를 지급하는 상근 직원을 두지 않는다. 개인과 가족의 자원 봉사를 매개로 직접 사업은 멀리하고, 모금과 자원 배분에 전력을 다한다. 기부도 개인 기부가 대세다. 2014미국 원조 재단이 펴낸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미국 내 기부금 가운데 개인 기부금은 전체의 72.1%에 해당하는 2,585억 달러였다. 2013년에 비해 54% 늘어난 숫자다.

 

그렇다면, 100여 년 사이에 미국의 비영리영역이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크게 세 가지 원인을 짚을 수 있다.

먼저, 투명성이다. 미국 재단은 기부와 모금 즉 세입과 세출 관계뿐만 아니라, 주요 상근 직원의 연봉 내역까지 모두 공개한다. 한국과 견주면 상장회사가 매년 발간하도록 규정돼 있는 감사보고서에 준하는 세부 운영 자료를 펴내고 있다.

전문성도 미국 비영리섹터 활성화를 이끈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폭 넓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기 보다는 수십 년간 일관된 사명과 비전을 갖고 그 어떤 기관 보다 높은 전문성을 보유한 곳들이 많다. 특히, 미국의 지역 기반 재단은 독특하고 고유한 지역 내 문제 해결을 위해 수십 년간 활동해 온 곳들이 다수다. 자산 기준 미국의 상위 20개 재단 가운데, ‘The California Endowment(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소재)’, ‘The Kresge Foundation(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소재)’이 대표적인 지역 기반 재단이다.

마지막으로 기부할 수 있는 환경 즉, 제도적 기반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기부와 관련한 세금 규정이다. 미국은 개인이 기부하는 금액의 50%까지 세금을 감면해 준다. 여기에 공제 받지 못한 기부금에 대해선 최대 5년까지 이월해 준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적어도 기부금 때문에 소득세 폭탄을 맞을 일은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