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수북이 쌓여있는 책과 문서들 뒤로 서류를 살펴보는 그가 보였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조금은 꿉꿉한 바람을 느끼며, 이명묵 대표님을 만났다.
그가 가진 직책은 다양하다. 현재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이며,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대표로 활동한다. 그리고 함께걷는아이들도 회원으로 참여하는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의 공동대표도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다. 이렇게 다양한 직책 중에서 그는 자신을 사회복지사로 맨 처음 소개했다.
“사회복지사가 된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원래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교사 외에는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정부 정책 변화로 그 길이 막히면서, 사회복지학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꿈이 좌절되고 선택하게 된 학과, 그리고 걷게 된 사회복지사의 길. 처음 시작은 고아원에서의 근무였다. 그리고 어느덧 3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11년, 우리나라에 복지국가 운동 바람을 일으킨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저도 참여하고 있었어요. 시민 단체 지도자나 활동가, 정치인, 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애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회복지사들이 없었어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운동인데, 우리의 사명인데, 왜 없는지. 부끄러움이 몰려왔어요.”
‘국경없는 의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 이런 전문가 모임을 예시하면서 주변 사회복지사들에게 복지국가운동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이하 세밧사)는 2012년 7월 11일, 복지국가 촛불 행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세밧사는 사민주의 복지국가 운동을 하는 사회복지사의 모임입니다.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 사회의 가치와 철학은 무엇인지 고민했고 5가지 주제를 찾았습니다. 정의, 인권, 평등, 연대, 민주주의지요. 세밧사는 이 5가지 주제에 대한 강연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 복지국가를 만드는 운동을 합니다.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대안을 찾아서 사회 행동(소셜 액션)을 합니다. 현재는 ‘줬다 뺐는 기초연금’과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밧사는 주거문제, 교육문제, 일자리 문제 등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해 나름의 대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만, 활동 인원이 제한적이고 역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재는 두 가지 문제(기초연금, 어린이병원비) 해결에 집중한다. 후원자가 많아지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0명의 활동 회원으로 활발히 복지국가를 만드는 세밧사가 다양한 사회 문제 중에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에 주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사회 문제 중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모든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이지요. 그런데 ‘아이의 생명을 모금에 의존하는 것이 맞나?’라는 질문이 우리 사회에 필요했습니다. 그걸 우연한 기회에 후배들과 나누게 되었어요. 그런데 후배들은 낯설어 했어요. 아픈 아이들 병원비를 모금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미풍양속이고 자원 조달하는 좋은 지원인데 이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어색했던 거지요.”
처음에는 망설였던 그들이 고민 후에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개인의 질문이 모두의 질문이 되면서 2015년 12월 관련된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2016년 2월에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가 출범했다.
“아이의 건강권과 생명권 즉 인권의 문제입니다. 국가는 관심 없고 책임지지 않고, 부모는 가난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사보험에 의존하거나 모금단체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지요. 이런 현상들, 잘못된 게 아닌가요. 저출산고령화가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에서, ‘아이를 낳읍시다.’ 캠페인을 벌이면서 정작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모순된 이야기가 아닌가요.”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 국민서명운동에 참여하는 이명묵 대표님]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그는 운동단체에서 쓰는 말로 공중전이라고 했다.) 어린이병원비 관련 이슈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배포하여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연대도 열심히 했지만 세상의 관심이 시기적으로 잘 맞아 들어갔어요. 연대가 출범한지 한 달 만에 정의당에서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을 정책으로 채택하겠다고 대답이 왔어요. 4월에 있는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이 어린이병원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정책 협약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5월 어린이날을 맞아 각 방송사에서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됐고 한겨레21에서는 기획 시리즈로 어린이병원비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 이후에도 관심이 지속됐다. 2017년 4월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후보자들이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을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직전에 어린이병원비 공약을 국민과의 약속 10대 공약의 1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 결과, ‘문재인케어’의 주요 내용으로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이 들어가는 성과를 얻었다.
“‘어린이병원비를 모금에 의존하지 말고 국가가 책임지자‘라는 1차 목표가 ‘문재인케어’로 실현되었어요. 그래서 그해 12월부터는 시즌2로 어린이병원비 100만원 상한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100만 원까지만 부모가 내고 그 외 추가되는 금액은 정부가 지원하는 겁니다. 현재 성남시에서 추진을 준비하고 있어요.”
어린이병원비 100만 원 상한제는 2~3년 내 실현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전 국민 100만원 상한제 운동이다. 전 국민 100만원 상한제가 잘 정착된다면, 무상의료가 실현될 수 있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상관없이 내 건강권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내가 이미 내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료로 집행하는 정책이기에 어린이병원비 100만 원 상한제에 드는 추가 비용은 없습니다.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 건강보험료를 조금 더 내야 하는 건 있지요.”
이렇게 연대활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는 함께하는 각 단체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대표님은 참여 기관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각 단체들 업무로도 많이 바쁠 텐데 한국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열심히 함께 활동해줬다는 것, 그것이 가장 인상적인 일이었어요. 품도 그만큼 쓰고 재정도 분담하면서 지혜도 내놓고…. 연대단체에 들어와 있는 모든 단체들이 한 마음으로 같이 활동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죠.”
거대조직도 아니고 마치 개미군단처럼 작은 단체들, 소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운동을 했는데 2년 반 만에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이었다, 작은 단체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이끄는 현장을 보아온 이명묵 대표님은 사회복지현장에서 연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복지현장에 있다 보면 개개인의 어려움을 접하게 됩니다. 개개인의 고통 뒤에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어요. 구조적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한사람의 사회복지사, 하나의 사회복지기관이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사회복지사들과 사회복지단체 간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 활동에 참여하는 함께걷는아이들-어린이병원비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올키즈스트라]
연대를 통해 공감대를 확산하다보면 한사람의 지혜보다 열사람, 백사람의 지혜가 더 큰 힘을 발휘함을 알게 된다. 함께걷는아이들도 연대의 힘을 믿고 여러 사회복지사와 사회복지단체들과 연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로 함께걷는아이들과 인연을 맺은 그는 함께걷는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사회에서 음악, 미술 등 문화권은 2차적, 3차적 권리로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1차적 관심사, 희망이 될 수도 있지요. 사회권 개념이 일찍 발달한 북유럽과 동유럽은 문화예술 교육을 거의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사회권이 상당히 늦게 발달하다보니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지원과 무상교육 시스템이 미흡한 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지원하는 함께걷는아이들은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밖에도 현실의 위기적인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지원했던 경우도 많아서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세밧사 5가지 가치 중에 연대가 있다. 연대 문화 정신과 사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함께 걷는 아이들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연대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빈부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풀어내는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과정에 함께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로서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노동자 관점이 큰 사람이 있고(social laborer) 사회복지사로서의 철학이 좀 더 있는 사람이 있고(social worker) ‘내가 복지기관에서 일하지만 한국사회를 사람들이 좀 더 살만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보겠어.’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상상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고(social designer) 그가 하는 사회복지 활동이 하나의 예술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사람(social artist)도 있을 수 있어요. 한국사회가 불행하게도 물질 중심주의 사회이고 또 개인주의가 팽배하다 보니 사회복지사들도 그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사회복지 기관에서 일하면서 월급 받는 그 정도 선에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고요. 나의 정체성을 노동자(social laborer)로 한정하지 말고 소셜 워커, 소셜 디자이너까지 확장하는 상상을 하면서 일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해요.”
육체적으로는 조금 힘들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는 동료 사회복지사에게 전한 그의 진심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더 많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들의 연대로 복지국가가 곧 도래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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