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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기자단 기사

숨기느라 수고했어, 오늘도 <영화 거인>

by 함께걷는아이들 2019. 11. 26.

[출처: 네이버 영화]

 

쉴 곳이 없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바꾸어 말해, 내 모습을 숨겨야 하는 것이 일상이라면 어떤 부담을 갖고 살게 될까. 감히 체감하기 어렵지만, 그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소년이 있다. 감정을 숨기다 못해 서 있는 장소마다 가면을 달리 쓴다. 그에 맞는 얼굴과 언행도 바꾸어가며 부단히도 애쓴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누구 하나 알아봐 주지 않아 홀가분해질 수도 없다. 그런데 소년도 막상 가면을 벗기는 두려운 눈치다.


<거인>의 ‘영재(최우식 분)’는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나와 보호시설에서 생활한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지만 아빠는 일하려는 의욕이 없고, 떨어져 사는 엄마는 아파서 돈을 벌 수 없다. 이 와중에 동생마저 자신이 있는 보호시설로 보내려는 부모가 혐오스럽다. 그런 집엔 절대로 갈 수 없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자신을 내보내려는 보호시설에서 어떻게든 버텨서 신학원에 입학해야 하는데 쉽게 풀리지 않는다.

 

[출처: 네이버 영화]

 

 

쉴 곳은 비단 장소적 의미만은 아니다. 영재가 진심으로 마음을 털어놓고 기댈 상대는 극 중 등장하지 않는다. 친구 ‘범태(신재하 분)’를 이용해야 하고, 성당에서는 자신의 꿈도 다르게 포장해놓았다. 보호시설의 원장에겐 착하고 싹싹해야만 한다. 가족한테 어리광을 부릴 아이도, 친구에게 진심 어린 고민을 나눌 아이도, 꿈을 만들어갈 아이도 <거인>에는 없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군가 앗아갔고, 살아남기 위해 너무 일찍 커버렸다.
영재가 거인이 된 이유에는 무책임한 부모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상처를 후벼 파는 어른들이 있다. “너 같은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상처가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의 거짓된 언행이 안쓰럽다. 무책임한 부모와 공감을 모르는 선생님과 쉼터가 아닌 쉼터, 알아주는 척하더니 결국엔 아이를 놓아버린 성당까지 아이를 거인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비단 ‘영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잘못 없는 아이들은 어른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범태의 아버지도 결국엔 자신 때문에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다. 숨통을 조이는 쉼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태는 좌절한다. 그 상처는 쉼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이 어렵다. 아이들은 살려고 전전긍긍하는데, 어른은 너무나 무능력하다. 아이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정작 어른들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출처: 네이버 영화]

 

 

한 청소년의 하루는 너무 숨 가쁘다. 가면으로 가린 상처는 계속 덧날 수밖에 없다.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이 너무 현실적이라 안타깝다. 이렇게 아이는 독립을 배운다. 옳지 못한 자립을 강제로 배운 아이의 짐이 버거워 보인다. 스스로 서야 하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방관하는 어른들에게서, 역설적이게도 함께 서주어야 바로 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살아남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은 실패에 가깝고 그의 진짜 모습은 극 중 결국 등장하지 못한다, 영재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성장한 거인이 되어있다. 상처받지 않은 척, 태연한 척, 밝은 척, 싹싹한 척, 담담한 척해야 하는 아이들의 일과가 가혹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아이들은 왜 가면을 써야 했을까. 물건을 훔치고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아이가 마냥 영악해 보이지 않는다. 타의에 의해 가면을 썼고 가면을 벗기 위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가면을 쓰는 일이었다. 온전히 아이들의 내면을 들여다 봐줄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 단 한 명의 어른이었다. 안타깝게도 극 중에서 그 어른은 등장하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가 더 씁쓸하다. 영재가 떠나가는 곳엔 가면을 벗겨줄 사람이 있을까. 여기엔 더 희망이 없으니, 오히려 그의 출발이 희망적이다. 그곳에는 온전한 어른이 영재의 고민을 함께 짊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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